BITTER WINTER

‘금병추첨’의 비밀: 공산당은 환생을 믿는가

한 신간 도서에서는 무신론적인 중국 공산당이 불교 라마의 환생 자격 결정권을 주장하는 이유를 설명하였다.

마시모 인트로빈(MASSIMO INTROVIGNE)

1792년 “라마에 대한 연설(喇嘛說)” 만주판, 옹화궁, 베이징(Bjoertvedt – CC BY-SA 4.0

중국 국경 내부에는 매우 특별한 신분증을 가진 천여 명의 시민이 있다. 이 신분증은 모두 공산당에 의해 정식으로 환생 권한을 인정받은 죽은 불교 라마의 환생자라는 증표이다. 공산당은 이 특별 신분증 소지자만이 특정 라마의 진정한 환생이라고 공인한다. 따라서 여타 다른 별도 환생자는 모두 공산당 경찰의 엄중한 처분을 받는다.

이 기묘한 관행은 달라이 라마가 겐둔 치에키 니마(Gedhun Choekyi Nyima)라는 여섯 살짜리 남자아이를 제10대 판첸 라마(1938 ~ 1989)의 환생으로 인정한 1995년 이후로 이어져 오고 있다. 바로 이 아이가 11대 판첸 라마, 즉 티베트 불교 겔룩파(황모파)의 최고 권위자인 달라이 라마 다음가는 제2의 지도자인 셈이다. 물론 중국 당국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중국은 이 아이를 구류하고 (그 이후 행방이 묘연하지만 달라이 라마와 공산당은 그가 살아있다고 주장한다), 직접 11대 판첸 라마를 찾아 나섰다. 공산당은 티베트인 동조자를 통해 겐둔을 제외한 후보자 목록을 구성했고 진번바핑(金奔巴瓶)이라 불리는 황금 항아리에 이름을 넣어 새로운 판첸 라마를 뽑았다. 이것이 곧 ‘금병추첨’이다. 공산당은 여러 이름 중에서 5살짜리 기알첸 노르부(Gyaincain Norbu)를 뽑았다. 그는 공산당의 지원을 받아 11대 판첸 라마로 훈련받았으며 공산당에 충성하는 중국 불교의 대표적 목소리가 됐다.

2007년, 국가종교사무국은 공산당이 환생 라마를 결정할 수 있는 《라마불교의 활불제도에 관한 관리법》을 제도화했다. 이는 명령 《제5호》라는 것으로 악명 높으며, 이를 통해 누가 진정한 환생인지 인증한다. 해당 규제는 국제적으로 광범위한 비난을 받았다. 무신론적 정당이 환생을 통제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빈축을 산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행은 여전히 공산당이 티베트 등지의 불교를 통제하는 강력한 수단이 되고 있다.

티베트 및 몽고에서 실제로 환생 라마의 계통은 수천에 이른다. 달라이 라마, 판첸 라마, 가마바(티베트 불교의 또 다른 대형 분파 가마가쥐파의 최고 지도자), 제쮠담바 후툭투(몽골지역 겔룩파의 최고 지도자로 현재 공석)이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이밖에도 무수히 많다.

고인이 된 고위직 라마의 새로운 환생이 과거에 식별된 방식, 또는 마땅한 식별 방식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현재 매우 정치적인 문제로 다뤄지고 있으며 역사는 주로 편파적으로 기술됐다. 2011년 9월 24일, 달라이 라마가 곧잘 인용되는 공식 전언을 발표했다. 그는 라모(Lamo), 네충(Nechung), 가둥(Gadong), 삼예(Samyé)의 티베트 4대 주요 영매(신의 말을 전하고 무아지경 상태에서 이야기하는 매개체)을 통한 신탁 구하기, 그리고 라사 남부에 위치한 라모이 라쵸(Lhamoi Latso)등의 성스러운 호수에 나타나는 계시 등을 관찰함으로 환생 후보자를 고른다고 설명했다. 달라이 라마는 라마의 영혼이 파편으로 나뉘어 한 명의 라마에서 여러 환생이 태어날 수 있었고 라마가 아직 살아있을 때 계승자가 “뿜어” 나올 수 있었으며 실제로 그런 일이 역사적으로 일어났다고 설명했다. 달라이 라마는 2018년 크리스마스에 실린 인터뷰에서 이러한 주장을 재차 강조했다.

그렇다면 적합한 후보자가 두 명 이상인 경우에는 어떻게 되었는가? 이론적으로, 겔룩파의 신학 교리상 모든 이가 고인이 된 라마 한 명의 환생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실제 각 고위직은 단 한 사람만이 차지할 수 있다. 달라이 라마는 결정하기 어려울 땐 “불상의 성물 앞에서 ‘신탁’을 구하는 방법이 있다”고 언급했다. 이 방식은 후보자 이름을 참파에 각각 싸서 그릇에 굴려 선출 후보 이름이 그릇에서 굴러 떨어질 때까지 굴리는 것이다.

달라이 라마는 또 ‘금병 추첨’에 대해 이야기했다. 1792년 건륭제(1711 ~ 1799)에 의해 도입된 방식으로 후보자 이름을 특별 제작된 황금 항아리에 넣고 추첨하는 것이다. 달라이 라마는 “만주족이 이 시스템을 도입했지만 티베트인은 영적인 성격이 부재하다는 이유로 이를 믿지 않았다. 그러나 정직하게 활용된다면 식탁 구하기의 자문 방식과 유사하다고 볼 수도 있다.” 달라이 라마는 이 방식이 달라이 라마 선정에는 11대(1838 ~ 1856), 12대(1857 ~ 1875)에 걸쳐 딱 두 번 활용됐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실은 딱 한 번이다. 12대 달라이 라마가 너무나 명백하게도 전통적 방식을 통해 선정됐기 때문이다. 판첸 라마의 경우, 8대(1855 ~ 1882), 9대(1883 ~ 1937)에 걸쳐 두 번 사용됐다.

앞서 언급됐듯이, 역사는 그 자체가 정치적이다. 공산당 사학자는 ‘금병추첨’의 광범위한 활용을 고집하고 티베트 사학자는 이를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달라이 라마의 2011년 전언은 현(現) 학계에 대한 상당히 정확한 인식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이후 새로운 문건이 드러났다. 청 황제의 공식 문건은 중국어로 쓰여 있었으나 ‘금병추첨”의 시스템을 공포한 건륭제의 유명 칙령(1792년 “라마에 대한 연설(喇嘛說)”)은 베이징 옹화궁(雍和宫) 암석에 만주어를 포함한 4개 국어로 새겨져 있다. 하버드 대학의 사학자들은 만주어로 쓰여진 문건 연구에 특히 집중했다. 만주어는 중국어와는 다른 언어로 청나라의 모국어였다.

오이드만 저서 표지

사학자 맥스 오이드만(Max Oidtmann)은 “금병추첨 제도의 형성: 청나라 그리고 티베트 환생의 정치학(Forging the Golden Urn: The Qing Empire and the Politics of Reincarnation in Tibet, 뉴욕: 콜롬비아 대학교 출판, 2018)”이라는 제목의 서적을 출간했다. 오늘날까지 ‘금병추첨’ 문제를 가장 광범위하게 조사한 결과물이다. 오이드만과 달라이 라마 모두 ‘금병추첨’ 도입의 주된 원인은 1791년 네팔 구르카(Gurkhas)의 티베트 침공 시도이며 티베트를 보호하고 네팔인을 물리치기 위한 청나라 군대의 개입도 한몫했다고 주장했다. 오이드만은 그러나 건륭제 및 그의 수석 고문들이 만주어로 주고받은 비밀 서신을 연구한 끝에 청나라가 네팔에 대해 그다지 우려하지 않았다고 결론 내렸다. ‘금병추첨’의 도입보다도 중요했던 것은 몽고 문제였다. 청나라는 몽고의 잠재적인 귀족 반동세력이 자신의 자녀를 핵심 몽고 라마의 환생으로 내세우는 것을 막고자 했다.

무엇보다 오이드만의 주장으로는 건륭제는 공산당과 달리 진심으로 환생을 믿었다. 건륭제는 신실한 불교 신자였으며 티베트 불교 겔룩파의 많은 요소를 찬양했다. 만주어로 쓰여진 첫 비밀 보고서는 네팔과의 전시상황에서 고위직 라마의 태도에 대해 우호적이었지만 구르카의 침략에 대응하면서 라마와 주요 호법의 부패로 인한 티베트 시스템의 취약성을 비난하는 등 이내 다른 그림이 펼쳐졌다. 건륭제는 몽고 문제와 더불어 이러한 보고서를 통해 티베트 불교가 동일한 가문의 자녀 중 고위직 라마의 환생을 조직적으로 찾는 등의 행위로 부패했다고 믿게 됐다. 그는 부활을 믿긴 했으나 티베트 호법(영매와 호법 전반에 대한 것이 아님: 그는 자신만의 영매와 호법이 있었음)에 대해서는 훨씬 회의적이다. 정치적 통제에서 벗어나 작동하는 애매한 도덕성의 권위자로 본 것이다. 건륭제는 네팔 티베트 전쟁 이후 티베트 호법에 대한 탄압과 ‘금병추첨’의 도입을 명했다. ‘금병추첨’은 명나라 황제가 성공적으로 도입하여 관료의 특정 지방 배정을 둘러싼 부패와 정실인사 척결했던 추첨 제도이다.

그는 부분적으로 성공했다. 황금 항아리는 현재 중국 역사학자가 주장하는 것보다는 적게, 그리고 동시대 티베트인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많이 활용됐다. 오이드만 자료에 따르면 1793년부터 1825년까지 주요 환생 수색의 대략 절반 정도에 활용됐고 전반적으로 52개의 서로 다른 주요 라마 계통에서 79번 사용됐다. 그러나 항아리에 들어가는 이름은 제국의 적대감에도 불구하고 계속 호법이 선택했다.

오이드만의 핵심 주장은 공산당과 일부 티베트 또는 서구 사학자 모두 ‘금병추첨’을 중국 주권 및 티베트에 대한 제국주의 수단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됐다는 것이다. 오이드만은 이들이 동시대의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으로 18세기, 18세기의 사건을 해석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는 건륭제와 일부 겔룩파 엘리트층은 라마 환생 시스템을 강화하고 더욱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티베트 불교 및 티베트를 더욱 안정화하려는 공동의 목표를 추구했다. 티베트인은 명백하게 식별된 강력한 후보자가 있는 등의 특정한 상황에 ‘금병추첨’에 반기를 들었는데 그것을 티베트 국가주의의 발현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 상황이 바뀌었다. 중화민국이 1936년 라마 환생에 관한 법을 통과시켰으며 공산당은 이를 2007년 명령 제5호를 위한 본보기로 삼았다. 그리고 20세기에 ‘금병추첨’에 대한 저항이 실제로 중국으로부터의 티베트 독립 선언이 된 것이다.

공산당은 집권 이래 라마 환생 문제가 민감한 사안이라는 것을 파악했으나 1989년 10대 라마의 죽음 이후에서야 행동에 착수했다. 오이드만은 명령 제5호가 2007년에서야 뒤따른 사실이 당내에서 내부 논의가 벌어졌다는 증거라고 해석했다.

오이드만의 최종 질문은 왜 공산당이 계속 죽은 라마의 환생을 자체적으로 선정하는 가이다. 공산당은 이제 그들에서 선출된 환생자가 티베트와 디아스포라 내 티베트인 사이에서 거의 신뢰를 잃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의 대답은 “현대 ‘금병추첨’ 행위의 목표 관객은 중국의 다수파 한족이며 티베트 또는 주변 자치주의 티베트인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現) 판첸 라마를 비롯해 공산당이 지원하는 환생인들은 티베트인에게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중국의 여러 신조를 가진 불교 사원에서는 역사가 오래됐으며 다소 신비하고 진정한 불교 전통의 대표자로서 권위적인 상류층이 됐다. 그리고 이들은 순진한 서구인을 대상으로 친(親) 공산당 티베트 불교를 소개하기 위해 해외로 나간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현 14대 달라이 라마가 단순히 공산당이 15대 달라이 라마를 ‘금병추첨’에서 선출, 선포한 사실을 부적절하다고 깎아내리지 않고 이 그럴듯한 전략에 대한 대응 방식을 두고 티베트 및 몽골 라마와 지식인의 대규모 회담을 장려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