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스 교수는 중국의 초기 기독교에 관해 역사와 고고학을 넘어선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다. 교수의 연구는 중국에서 기독교가 “외국”의 종교가 아니며 사실은 일부 유럽 ”기독교” 국가보다 먼저 중국에 도달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기독교의 “비(非)중국적”인 특성은 중국의 반기독교 선전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주장이며 기독교인에 대한 감시와 종교적 자유 제한을 정당화하기 위한 방편이 되어 왔기 때문에 윌리엄스 교수의 연구는 비터 윈터에서 매일 논의되고 있는 이슈와 관련해 굉장히 시의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기념비의 의미를 과대평가하기 일쑤이지만 그렇다해서 과소평가해서도 안 되죠. 기념비는 1623년에 재발견되었고 이후 역사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690년 4월, 이탈리아 예수회 선교사인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가 처음 중국에 진출하고 100여년이 지난 시점, 중국에서 예수회는 베이징 황제의 완전한 신임을 얻고자 노력했습니다. 당시 산둥성에서 중국의 기독교인들이 선동성이 짙은 거짓 컬트 추종자로 몰려 구속되었죠. 여러 프랑스인 예수회 회원들은 만주滿族) 법원사무관을 통해 이들의 석방에 대한 희망을 표했습니다. 면담을 통한 예수회 회원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개입을 거부했죠. 이(사제가 아님)는 황제에게 경교비가 “과거에 기독교가 중국에서 부흥했으며 선대들이 존경을 다해 대우했다는 증거”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주장은 황제의 호기심을 크게 불러일으켜 비문의 사본을 요구했죠. 이후 기독교인에 대한 황제의 전반적인 대우가 크게 개선됐습니다.
1년 후, 황제의 가장 어린 동생이 기독교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 같은 사제를 찾아갔습니다. 그는 구체적으로 이들이 대변하는 종교가 과거에 처음 중국에 진출했을 때와 달라진 부분이 있는 지 물었죠. 예수회 회원들은 경교비가 이와 같은 사실을 증명한다는 것을 설명했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정부에게 기독교인에 대한 보호를 재요청하는 근간이었습니다. 이 사건 발생 1년 뒤, 1692년 3월 22일에 청나라 강희제(康熙帝, 1654-1722)에 의해 종교 관용 칙령(容教令, Edict of Toleration) 선포됐으며 로마 가톨릭 교회를 인정하고 이들 교회와 선교자에 대한 공격을 금하며 중국인의 기독교 신앙 생활이 법적으로 허용되었습니다.
네스토리안(Nestorian)이 정확하게 무엇인가요?
오늘날 생존을 위협받고 있는 교회로, 이 동방교회(東方教會, 종종 네스토리안 교회라고 잘못 불리움)는 교회 역사상 가장 넓은 지역에 걸쳐 복음을 전파했고 비잔틴이나 로마 교회보다도 훨씬 더 넓은 영역에 걸쳐있었습니다. 3세기 말에 기독교는 아라비아나 인도 북서부 지역에 도달했습니다. 100년 뒤에는 호라산(Khorassan, 이란 동부)지역에서도 기독교인을 찾아 볼 수 있었죠. 이들은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북부 및 우즈베키스탄 남부로 알려진 지역으로 이주한 튀르크족을 전향시켰습니다. 동방지역의 교회는 알렉산드리아, 에베소, 칼케돈, 콘스탄티노플 등지의 교회와는 차별화되는 언어와 문화를 형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지형이나 언어와 같이 차이가 명백한 부분 외에도 동방교회는 특유의 교회적, 정치적 특성을 갖추기 시작했고 해당 가톨릭 종파는 “콘스탄틴(Constantine)”을 따로 두거나 장기적인 물류 지원을 구하는 일도 없었습니다. 신정국가 설립을 도모하지도 않았죠. 중앙 아시아 지역에서 기독교가 국교가 된 사례는 없습니다. 물론 때때로 페르시아나 박트리아, 중국 및 몽고의 왕과 황제가 기독교 및 선교사에 대해 관용적이거나 심지어는 협력적인 태도를 취한 적도 있으나 기독교인은 기본적으로 수십년 간 박해에 시달려왔으며 결과적으로 라틴 및 그리스 교회에 비해 역사적 문건이 부족한 실정이죠. 이에 동방교회는 규모를 확장하기 위해 강제력이나 정치적 억압을 사용한 적이 없으며 단지 주요 무역 경로를 통해 소그드어(실크로드의 공용어), 위구르어, 구(久)돌궐어, 몽고어, 중국어 문화권에 소규모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며 발전했습니다. 이들은 예배식에서 시리아어를 사용한 듯 하지만 기독교는 (이슬람교와 달리) 단일어만 사용한 것이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 성서는 한 번도 단일어에 한정되지 않았죠.
4세기 초 즈음에는 아라비아 반도, 셀레우키아-크테시폰(Seleucia-Ctesiphon), 전 페르시아 수도(바그다드 북서부에서 19마일) 부근, 아르벨라와 바스라(이라크), 메르브(Merv 혹은 Marv, 투르크메니스탄), 테헤란, 헤라트(Herat, 아프가니스탄 서부), 시스탄(Sistan, 이란 동부)에 적어도 424개의 도시 내 주교 집무실이 설립됐습니다. 적어도 6세기에는 중국 서부에 기독교적 증거가 등장했으며 시안과 베이징에 도시 주교직이 생기기에 이르렀으나 현재는 잊혀진지 오래죠.
기독교 표현 및 관행이 존재했던 여러 민족지학적 지역이 서로 다른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특히 기독교 자체가 특정 지역의 풍습과 언어에 적응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동시에 이란과 중국 서부지역의 교회는 예배식, 신학 등의 측면에서 핵심적으로 유사성을 보입니다. 내재적으로 근본적인 유사성을 갖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당시 주교와 “도시 주교(지역 주교)” 사이에 광범위한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죠. 신앙심과 신앙생활을 지속하기에 이러한 교차 의사소통 및 교감 채널이 가장 강력한 수단이 됐을 것입니다.
다시 시안지역의 네스토리안 기념비가 특히 중요한 것 같습니다. 좀 더 자세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이른바 ”경교비”의 재발견은 우리에게 기독교에 대해 어떠한 역사적 문서나 석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굉장히 독특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바로 기독교가 이미 중국에 진출을 했었다는 정보입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중국에서 초기 기독교의 영향력의 크기나 범위를 제한합니다. 하지만 이 기념비를 논하지 않고는 기독교 수용의 성격이나 개입 및 전파 수준에 대해서 추측하기 힘들 것입니다. 당나라에서는 네스토리우스 교를 지지하고 해당 종교의 진출을 지원하는 권세가와 군 참모도 존재했죠. 네스토리우스 교는 중국이 외국 종교 전파에 가장 우호적이었을 때 진출했습니다. AD 635년 이전 페르시아 출신 상인이 시안에 많이 거주하였고 그들 중 일부는 네스토리아 교인이었죠. 이들의 수가 증가하자 네스토리우스 교 지역사회를 지원하기 위해 알로펜(Alopen) 주교가 선교단을 이끌고 당나라 수도로 왔습니다. 당시 당나라 궁중은 알로펜 주교와 선교단을 환대했으며 경전 번역과 교리 복음을 허가해 주었습니다. 이는 당나라의 관용 정책과 외국 종교 진흥에 대한 관심을 보여줍니다. 알로펜이 장안(長安)에 도착했을 때 당시 도교 및 유교와 추종자를 두고 경쟁하던 불교는 이미 중국에서 500년 가까이 성장을 지속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당나라는 불교, 도교, 유교가 수세기동안 종교적 측면을 장악하고 있는 등 혼란스러운 양상을 띄고 있었고 이는 곧 네스토리우스 교가 철학적, 정신적으로 진공 상태일 때 중국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638년, 알로펜은 중국 관계자들의 도움을 받아 중국어로 된 첫 기독교 서적인 메시아로서의 예수 경전(The Sutra of Jesus the Messiah)을 완성했습니다. 이 경전은 번역본이 아니라 시안의 교회 사정에 맞게 자유롭게 편집되었습니다. 학계에서는 원본은 시리아어가 아닌 페르시아어 혹은 소그드어였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예를 들어 ”Uo-li-si-liam”이라는 단어는 페르시아어로 예루살렘을 음역한 듯 합니다.
알로펜은 중국어로 된 첫 기독교 서적에서 기독교에는 중국 고대 전통을 전복할 만한 요소가 전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는 국가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는 것이 기독교 교리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강조했죠. 781년 네스토리안 기념비에서 알 수 있듯이 네스토리우스교 수도원 벽에 당 태종(627-649) 황제의 초상이 그려져 있으며 이는 라벤나(Ravenna)의 비잔틴 교회에 있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483-565) 초상을 연상시킵니다. 하지만 이 초기 중국 고전은 단순히 기독교에 대한 사죄가 아닙니다. 이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소개였죠. 탄생부터 수난에 이르기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처음으로 중국 독자에 소개된 것입니다. 장안 외 다른 지역에서도 네스토리우스 교 수도회가 여럿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뤄양(洛陽)지역에서는수도원이 세워졌고둔황(敦煌), 링우(靈武)및 스촨(四川)에도 수도원이 있었으리라 추측됩니다.
그런데 이후 네스토리우스 교가 중국에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렇게 교과서에 쓰여져 있죠.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진 건가요?
네스토리안 기독교는 기세와 능력이 대단했던 측천무후(624-705)의 통치 기간 동안 심각한 후퇴기를 겪어야 했습니다. 690년, 측천무후는 스스로 주 나라의 건국자라고 천명했죠. 당나라가 쇠퇴하고 네스토리우스 교 역시 중국에서 빠르게 쇠퇴했습니다. 986년, 나지란의 한 수도승이 982년 네스토리우스 총주교가 중국으로 보낸 나지란 출신의 한 수도승은 다음과 같이 전했습니다. “기독교는 중국에서 완전히 소멸됐다. 자생 기독교인들은 완전히 사라졌고 이들이 다녔던 교회는 파괴되었으며 이 땅에 기독교인은 딱 한 명만 남아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이 단일 증언에 너무 많은 중요성이 부여됐으며 중국 네스토리우스교회 전체에 대한 정확한 보고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일각에서는 네스토리우스 교회가 페르시아 및 중앙아시아에서 추방된 종교라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중국적 형태의 기독교가 아니며 기독교가 중국에 옛 뿌리를 두고있지 않다는 주장이죠. 이러한 반대 주장에 대해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경교비”의 기도문이 중국어로 쓰여져 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네스토리우스 교에 많은 중국인 신자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기에 충분합니다. 게다가 845년 종교 박해 당시 페르시아 및 중앙아시아 출신 외국 수도승 외에도 네스토리우스 교 중국인 수도승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불교 혹은 도교 신자들 처럼 이들도 평범한 삶으로 돌아가 본래 소명을 다하고 세금을 납부하라는 강요를 받았죠. 기독교가 어느 수준까지 중국에서 생존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떤 종파도 절멸하는 것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네스토리우스 교가 중앙 아시아에 존재했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시리아어 작가나 초기 무슬림 역사학자들 역시 중앙 아시아의 기독교 공동체에 대해 언급하고 있죠. 13세기에 라반 사우마(Rabban Sauma, ca. 1225-1294)가 중국에서 중앙아시아를 통해 서구로 여행했을 때 기독교 공동체와 머물렀다고 기록했습니다. 또 13세기에 도교 신자 창춘(Changchun, 1148-1227)이 중앙아시아에 칭기스칸(1162-1227)을 보러 갔을 때 기독교인(Tarsa) 지도자와 만남을 가졌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우리는 방대한 양의 불교 문건 중 둔황에서 발견된 여러 중국어 기독교 문건들을 통해 중국 내 동방교회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됐습니다. 이 문건들은 아마도 둔황(고대 사주(沙洲))의 기독교 수도원에서 나왔을 것입니다. 찬송가와 설교문이 포함되어 있으며 특히 찬송가는 중국 관중을 위해 시리어로된 성서 자료를 이용해 작곡된 것이지만 번역은 아닙니다. 이들의 주 목적은 유교 당국에 기독교 유일신주의가 철학적으로 건전하며 기독교인들은 높은 도덕성을 함양하고 윤리적 원칙에 따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죠.
중국 및 사마르칸트의 연계는 굉장히 지속적이었고 중요했습니다. 그 곳 기독교인은 어땠나요?
사마르칸트는 635년 중국 수도 시안에 동 시리아 기독교인이 도착했을 당시 동방교회의 중심지 역할을 했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8, 9세기 즈음 카스갈(喀什)의 극동 도심지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12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한 곳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사마르칸트에서 초기 기독교 건축물을 발견하지는 못했으나 마르코 폴로(1254-1324)는 1272년 도시를 방문했을 때 세례 요한에게 바치는 원형 교회를 봤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르메니아의 군 치안관인 셈파드(Sempad, 1208-1276) 역시 1248년 도시를 방문했고 예수와 3인의 동방박사가 그려진 교회를 봤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마르칸트에서 남쪽으로 4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우즈베키스탄 우르구트에는 9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여러 시리아어 석비문과 십자가 무늬가 발견됐습니다. 근방에서 최근 고고학적 발굴로 기독교 건물로 추정되는 구조물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이 곳은 무슬림 연대기 작자인 이븐 하갈(Ibn Hawqal, ?-978)이 969년경 해당 지역을 방문했을 때 묘사했던 수도원 자리일 수 있습니다. 그는, “사마르칸드 부근에 기독교 수도원이 있으며 이곳에 기독교인들이 모이고 수도 생활을 한다. 나는 이라크 출신의 기독교인과 여럿 마주쳤다. 이들은 멀리 떨어진 좋은 장소와 건강에 좋은 기후를 찾아 이 곳으로 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사마르칸드 남부에 타지키스탄 헤프탈인 도시인 펭지켄트(Penjiken)로부터 8세기 도편이 발견되는데 여기에는 단순한 버전의 시편(Psalm)이 시리아어로 적혀져 있습니다. 그리고 우즈베키스탄 테르메스(Termiz)에서는 고고학자들이 옥수스 강(Oxus River) 부근에서 교회 2채와 세례당을 발견했습니다.
고고학적 발견 중에 중국과 연계성을 보여주는 것이 있나요?
네, 그리고 물론 차후 더 많이 발견될 것입니다. 1995년, 8세기경 소그드어로 쓰여진 기독교 찬송가 “Gloria in excelsis Deo”가 투르판(Turfan)에서 발견됐습니다. 소그드어가 실크로드의 주요 언어 중 하나였기 때문에 이 자료가 중국에서 왔고 기독교 집단이 사용했을 가능성 있습니다. 해당 찬송가의 중국어 버전 또한 시리아어에서 번역됐습니다. 2009년, 중국에서 기독교 장소가 발견됐고 아시리아 동방교회(이른바 네스토리아스 교회)에 의해 역사적 장소로 확인됐습니다. 허난(河南)성 중부의 룽먼 석굴(龙门石窟)에서는 기독교인의 납골 저장소가 발견되기도 했어요. 이 곳은 위에 십자가가 있는 돌벽의 벽감으로 묘사되고 있죠.
일각에서는 이러한 발견이 오로지 역사학자나 고고학자에게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교수님은 이러한 고고학적 발견이 중국의 현 기독교에 있어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계신데요. 이유를 설명해주시겠어요?
네. 많은 이들이 이런 발견이 갖는 의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중국에 있어 이질적인 서구 현상이라고 비춰질 때마다 잘못된 인식이 더욱 퍼져나갑니다. 바로 이러한 인식이 현대 중국과 고대 기독교의 존재 사이의 연계성을 끊어버리고 있어요. 이러한 믿음은 반 정도의 진실과 근거가 부족한 역사적 해석이 맞물릴 때 더욱 확산되는 법이죠. 예를 들어 초기 기독교가 중국인들과 충분히 조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중국에서 완전히 실패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즉, 네스토리안이 너무 이질적이고 선교성이 짙어 중국화되지 못한 것이라고 보는 시각입니다. 물론 다른 방향으로도 결론을 내리기 힘든 부분입니다. 하지만 기독교가 이질적이지 않은 곳은 세계에서 예루살렘 밖에 없습니다. “잘못된 인식”에 연계된 반대 관점은 8세기 이후 기독교가 불교 및 도교 용어나 상징 이미지 등을 차용해 지나치게 제설통합주의적이 됐다고 보는 것입니다. 교회는 결국 지나치게 아시아화(化)되어 정체성을 잃었다고 주장하죠. 그런 주장은 근거가 부족할 뿐더러 제설통합주의적 전략이 곧 본 정체성 상실로 이어진다는 추정은 잘못된 것입니다. 아시아에서의 마니교 성행이 좋은 예가 될 수 있습니다. 마니교는 그들 주변 및 불교 신자의 의복, 관행 등 종교 관습을 흡수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제국에서보다 아시아에서 더 오래 지속됐습니다. 결국 지질학적, 사회적, 정치적으로 기독교 신앙이 가장 번성할 수 있는 곳을 찾았는 가의 문제인 셈입니다.
박해받았다는 사실이 곧 기독교가 중국의 정신과 맞지 않은 이질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결론으로 이어져서는 안되는 것인가요?
사실, 또 다른 잘못된 인식이 바로 기독교가 이후 왕조로 인해 중국에서 퇴출됐고 박해받았기에 중국 사람들과 맞지 않았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한참 뒤에 네덜란드인, 영국인, 미국인 등이 들여온 기독교 신앙이 중국의 정체성을 앗아가려는 또다른 기류라고 보기 쉽습니다. 이에 대해 저는 유럽과 북부 아메리카 출신의 기독교인들이 로마제국에서 시작된 기독교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현재 이른바 “서구적”이라고 불리는 것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중국에 점차 들어와 종교적 번영/박해 및 쇠퇴를 겪은 기독교인들이 결국 다르긴 하지만 맥은 같이하는 기독교 계보, 즉, 페르시아, 시리아, 아라비아 계보를 따르고 있는 셈입니다. 바로 이러한 장소들을 대진경교유행중국비의 “대진”이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다른 가설이 중국인 기독교인들이 이슬람이 부흥하기 시작하자 일제히 소멸했으며 이는 곧 이슬람이 기독교보다 중국 정신에 가깝다고 보는 것입니다. 역사적 기록이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나요?
요즘 학자들은 이러한 관점을 수용하지 않습니다. 8세기부터 12세기 사이에 기독교가 이슬람교로 인해 쇠락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팍스 몽골리카 시대의 중앙아시아를 한번 들여다 봐야하는데요. 13세기 초기, 여러 아시아인 부족들 사이에 기독교인이 존재했습니다. 해당 부족들 중에서는 Naiman, Merkit, Önggüt, Kerait, Tangut, Qara Khitai등이 있었죠. 하지만 이 부족들 전체가 기독교로 전향했다는 주장은 조심스럽게 검토해봐야 합니다. 13세기 중반, 중앙아시아에서 징기스칸 제국까지 이동했던 교황 사절단과 상인의 기록에 따르면 몽고인들 중에서도 기독교인이 있었습니다. 특히, 라틴 수도사 지오반니 다 플라노 카르피나(Giovanni da Pian del Carpine, 1182-1252)와 루브루크의 윌리엄(William of Rubruck, 1220-1293)은 몽고인들과 함께 지내며 몽고의 종교적 관용과 몽고 대지에 살고 있는 “네스토리안” 기독교인의 영향력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루브루크는 부활절 전야에 60명의 사람들이 세례식을 갖는 것을 목격했고 카라코람(Karakorum) 부근의 교회에서 “네스토리안”이 성찬식을 기념했다고 기록한 것이죠. 분명 몽고의 권세가 꺾이면서 기독교인의 상황이 위태로워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또 서구 기독교인들이 아시아 기독교인들을 대면했고 설립된 교회에 대한 기록물을 봤을 때 아시아 기독교인이 꽤 많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교수님께서는 모든 이들이 기독교가 사실 중국에 최근에 들어온 것이 아닌 태곳적부터 존재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정신적 고향이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공동체는 중앙아시아 및 중국에서 번성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한 사실은 적대적인 환경에서 소수자로서 정체성을 지켜낸 이들의 힘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언제나 이러한 지역에서 소수자의 종교였지만 수세기에 걸쳐 서로 다른 지도자들이 그 메시지와 영향력을 인정했습니다. 중국 네스토리아스 교인, 즉 “네스토리안”가 완전히 소멸했다는 것을 증명할 수는 없으나 그렇게 널리 추정되고 있습니다. 구 아시아 기독교의 잔재가 차후 수 세기에 걸쳐 아시아 및 중국으로 계속 유입된 유럽 선교사들에 의해 천천히 동화됐을 수 있습니다. 만약 이것이 상황을 설명하기에 정확한 방식이라면 경교 혹은 “네스토리안” 기독교는 거의 남지 않았다고 볼 수 있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사실은 바로 중국 내 기독교의 존재가 고대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이며 만약 일부 중국인이 기독교가 이질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사실은 서구에게도 기독교는 이질적인 것입니다. 기독교 메시지는 중국에 전해지던 시기에 아일랜드에도 전해졌습니다. 우리는 기독교가 동양 뿐만 아니라 서구에서도 고대 유산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둘의 차이가 있다면 바로 기독교라는 “불씨”가 서구에서는 천천히 꺼지고 있는 반면 동양에서는 박해받을 지라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으며 중국 문화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